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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 만난 사람들-U상

저녁을 먹고 크리스마스 캐롤을 들으며 아이들과 놀고 있는데 전화가 울렸다. 이 시간에 전화할 사람이 없는데 하며 의아해 보니 일본에서 온 전화였다. U상이었다.
올해 9월 일본 간사이에서 큰 지진이 났을 때도 U상한테서 대피하라는 문자와 함께 전화가 울렸었다.

14 년 일본 생활 동안 수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U상은 그 중 오래 알고 지내기도 했지만 어떤 의미로 잊혀지지 않는 사람중의 한 명이다.
U상의 첫인상은 한마디로 아나운서 같은 분위기였다. 이지적인 분위기의 여성이었다. 어깨 위에 닿을락 말락한 정도의 길이에 자연스러운 웨이브를 한 헤어스타일. 연하늘색의 원피스에 윤기가 흐르고 유난히 탱탱한 피부결을 가지고 있었다. 립스틱을 바르고 마스카라까지 했지만 아주 세련되고 내추럴한 화장을 하고 있었다. 일본어 선생이라 했다.
우연히 집도 가까웠고 서로 성격도 맞았는지 알고 지낸지 얼마 안 되어 우리는 밥도 같이 먹으러 가고 1 년이 되기 전에 같이 여행도 자주 가게 되었다. U상은 기혼자였다. 결혼한지 거의 20 년이 되어간다 했다. 하지만 아이는 없었다. 그래서인지 결혼해서 아이를 둔 또래보다는 10 살은 젊어 보였다. (나보다 나이가 많다는 건 알았지만 거의 10 살이나 많아 깜짝 놀랐다)물론 자기 관리에도 철저했다. 당연히 술 담배는 하지 않았고 항상 운동을 하면서도 소신(痩身、다이어트를 위한 맛사지나 기계를 쓰는 곳)에 다니고 보톡스, 레이저 필링 같은 것을 정기적으로 맞았다.( 처음 만났을 때 피부가 유난히 탱탱하다고 느낀 이유도 그 때문이었으리라) U상을 만나기 전에는 내가 아는 일본 지인들 중에 성형(아니면 시술)을 한 사람도 없었고 다들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U상의 미(美)에 대한 열정에 참 놀랐다.
U상의 남편은 중소기업의 부장이었는데 비교적 부유하게 살고 있었다. (결혼 전에 남편과 같은 회사에서 일했었다고 했다) U상은 일을 하지 않아도 되지만 집에 있는 것도 싫어 일본어 교사가 되었다고 했다. 계기는 마침 한류에 빠져 한국어 교실을 다니고 있었는데 자신도 외국인을 만나면서 가르치는 일을 하고 싶었다고 한다.
한 번은 “이렇게 날씬하고 아름다운 부인을 둬서 남편분 참 좋으시겠어요.” 하고 농담조로 말하니 정색을 하며 남편과는 각방을 쓴다고 했다. 일본인 부부사이에 각방은 별난 것이 아니라서 그런가보다 하고 넘어갔지만 부부사이가 그다지 좋은 것은 아니라는 인상을 받았다.
그리고 그 다음 번에 만나 밥을 먹는데 U상이 “한국인 남자를 만나고 있다”고 했다. 한국인 남자를 사귄 건 이번이 세 번째라고. 멍했다. 그 때 나는 할 말을 잃고 어쩔 줄 몰랐다. ‘불륜은 알겠는데 왜 다들 한국남자하고...’ 그 다음 말이 더 난감했다. “다 가르치던 학생들이었어요.” 아무한테도 말 할 수 없는 비밀이 무거워였을까. 아님 내가 말하기 편해서 였을까. 그 동안의 밀회와 연애(?)사가 봇물처럼 터져나와 그 남자들과의 로맨스(?)를 일일이 말해주었다. 모두 내 두 손 두 발이 오그라들 정도로 달달한 애정 표현을 하는 로맨틱 가이들이었다. 그리고 하나같이 U상보다 스무살이 훨씬 어린 남자들이었다. 나는 아무말도 할 수 없어 그저 듣기만 했다. 물론 U상이 남편과 부부사이가 원만하지 않다는 건 어느정도 느끼고 있었다. U상이 나와 삼박사일로 홋카이도에 가거나 일주일에 몇 번이나 밤 늦게 돌아와도 U상의 남편은 아무런 상관을 하지 않았다. 필경 남편도 불륜을 저지르고 있는 듯 했다. (둘 다 알면서도 함묵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지금 만나고 있는 한국사람은(그리고 그 전에 사귀었던 한국사람들도) U상이 기혼인 걸 알고 있었으며 모두 U상이 이혼하고 자기와 결혼해 주기를 원한/했다고 했다. 지금 사귀는 사람은 U상이 사는 곳을 보고 싶다며 U상의 집 앞에까지 왔다갔다고 했다. 그 말을 하는 U상의 눈과 목소리에도 애처러움이 배어있었다. 너무나도 대담하고 안타까운(?)사랑에 한마디 안 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사랑하면 왜 남편분과 이혼하고 그 사람과 같이 안 사세요?”
여러가지 이유(변명)가 있었다. 세자매 중 장녀인 U상이 어머니를 모시고 있고 그걸 허락해 준 남편을 배신할 수 없다는 것, 자신이 한국에 가게 되면 어머니를 모실 사람이 없다는 것(두 동생들과 어머니는 사이가 그렇게 좋지 않다고 했다) 몇 년 후면 정년퇴직 하는 남편을 내칠 수(?) 없다는 것. 불륜을 떠나 내가 보기엔 U상이 그 남자를 딱 그 정도로만 좋아하는 것 같았다. 일 년에 두 세번 한국에서 일본에서 밀월 여행가는 정도로.

U상은 자상한 사람이었다. 세세한 것들 이를테면 한국 기사나 뉴스를 신문에서 잘라서 주거나 알려주었고 어느 집 장어 덮밥이 자연산인지 알려주었다. 나도 U상을 언니처럼 좋아했다. 취미도 비슷했고 기가 잘 맞았지만 U상의 가치관과 내 것은 참으로 달랐다. 싫은 건 싫고 좋은 건 좋다라고 생각하는 나에게 이중 인생을 살고 있는 U상을 온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분명 U상에게도 사정이 있고 이해타산이 있어서 그랬겠지만 나와는 맞지 않는다.
내가 결혼을 하고 첫애를 낳자 U상과 만나는 기회가 점점 줄어들었다. 그리곤 아이가 두 살이 되도록 한 번 밖에 만나지 않았다. U상은 “다들 애가 생기면 정신없고 마마토모(엄마 친구)가 생겨서 자연스럽게 소원해지더라구”라며 오히려 날 위로해주었다.

이곳에 이주한지 1 년만에 그녀가 연락을 해왔고 그 때도 이번에도 연락을 받지 않았다. 일본을 떠날 때 그런 사람들과 관계를 정리하고자 마음 먹었다. 이제 U상은 알겠지. 그녀와의 관계를 일부러 끊었다는 걸.
사람을 잘 사귀는 것도 잘 헤어지는 것도 중요하다지만 아무리 좋은 사람이라도 나와 가치관이 다르면 멀어질 수 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