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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원의 두 얼굴

슈퍼에 가려고 딸아이와 집을 나서는데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 했다. 코를 찌르는 오줌 냄새와 함께 너덜너덜 떨어진 옷을 입은 한 흑인 남자가 갑자기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집 모퉁이 벽에 너무 가까이 앉아 있어서 잘 보이지도 않았고 그 남자의 모습은 노숙자의 바로 그것이었기 때문에 등골이 오싹했다. 몇 달전 공원의 화장실을 쓰려던 관광객이 아무런 이유없이 노숙자에게 폭행을 당해 입원한 뉴스가 뇌리를 스쳤다. 그 전에는 일광욕을 즐기던 주민(여자)이 잠깐 쳐다봤다는 이유로 노숙자에게 얼굴과 머리를 구타 당했다는 뉴스도 났었다.

이곳은 거의 일년내내 수영이 가능할 정도로 기후가 온후하다, 아니, 덥다. 정말이지 티셔츠 한 장으로 한 해를 지낼 수 있다. 그에 반해 물가는 내가 살았던 오사카나 미국 본토보다 적어도 1.5배는 비싸다. 특히 집세(렌트비)는 보통 한 달 월급을 다 줘야 할 정도다. 그래서인지 일을 그만두거나 해고를 당하면 노숙자가 되는 것은 시간 문제다. (날씨도 더우니 그냥 밖에서 자는 것도 그리 큰 문제 될 게 없다) 거기다 상당수의 노숙자가 미국 본토에서( 특히 추운 겨울에) 편도행 티켓으로 와 눌러 앉아 버리거나 지금도 오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더더욱 기하급수적으로 노숙자들이 늘고 있다. 노숙자들도 다 각각 사정이 있겠지만 대다수가 마약이나 알콜 중독자라는 게 문제다. 한 마디로 제정신이 아니기 때문에 그냥 지나가는 사람이나 외국인 관광객 등을 폭행하거나 헤꼬지를 하기에 정말 겁이 난다. 한 번은 길거리에서 한 여성 노숙자가 난데없이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며 남편과 나를 향해 돌진해 왔는데 남편이 기겁을 하며 내 손을 잡고 도망쳤다. 나중에 물어보니 많은 여성 노숙자들은 매춘도 해서 에이즈나 성병을 가지고 있다며 잘못해서 할퀴거나 상처를 입으면 큰 일 나니 도망쳤던 거라고 했다.

이곳의 유명한 식당이나 해변에서 사진을 찍으며 바캉스를 즐기는 관광객들 옆에는 노숙자들이 쓰레기통을 뒤지고 돈을 구걸한다. 빨간 스포츠 오픈카를 몰며 드라이브를 즐기는 관광객이 교통 신호에 멈추면 ‘헬프’라고 쓰여진 펫말을 든 노숙자들이 차창을 두들긴다. 다운타운의 콘도나 비즈니스 빌딩들은 누가 더 높이 올려지나 경쟁하듯 더 높이 지어지고 있고 부동산도 해마다 최고 가격을 갱신하고 있다. 그에 반해 유명한 공원들은 이미 노숙자들 텐트로 일색이다.
빈부격차가 나날이 아주 심해지고 있는 이곳이 불안하다. 이전 미국 엘에이에서 살 때도 노숙자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주택가까지 노숙자가 들어오는 것은 본 적이 없었다.
설마, 언젠가 부자 아니면 거지, 이렇게 두 분류만 남는 건 아니겠지(물론 나는 거지가 되겠지만)
과연 이곳은 누구의 낙원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