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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에서 꾼 꿈을 믿는 사람-찬니

이제껏 다양한 환경의 사람을 여러 만나왔다고 생각했지만 찬니를 만난 후 그건 나의 착각이었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체조 교실에서 만나 몇 번 같이 동물원에 가거나 점심을 하다 가까워진 엄마들이 몇몇 있다. 그 중 한 명인 태국인 찬니는 나이도 나와 비슷하며 우리 둘째를 아주 귀여워했다. 그녀의 딸은 둘째보다 1 살 많지만 둘은 서로 다투지도 않고 사이좋게 잘 놀았다. 찬니는 내가 아플 때 직접 음식을 해서 솥채로 가져다 주는 등 여러가지로 챙겨줘서 참으로 고맙고 다정한 사람이라고 느꼈다.

찬니와 친해지기 전까지는 나처럼 그저 보통 가정 주부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남자친구”와 같이 산다고 했을 때 왜인지 모르지만 그 남자는 건달(?)같은 사람이 아닐까 했다. 왜냐면 그녀의 집은 체조 교실에서 꽤 멀었는데 버스를 타고 다녔고 남자친구의 차는 주말이나 남자친구가 안 쓸 때만 쓸 수 있다고 했기 때문이다. 아이가 두 살이 넘도록 결혼도 안 해주는(?) 남자는 건달일 거라는 내 편견도 한 몫했다. 찬니와 두 세번 만나고 우연히 그녀의 남자친구를 만날 기회가 있었는데 말 그대로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그녀의 남자친구는 65살의 백발 백인으로 마침 미국 본토에서 그의 큰아들이 놀러와 있었다. 그 아들은 38살이었고 그 세명이 나란히 서있는 모습은 나에게 참으로 어색했다.
더더욱 놀라운 건 “남자친구”는 벌써 두 세번 결혼으로 (성인이 된) 아이가 대여섯 명 있고 전 여자친구들 사이에서도 아이들이 있다는 거였다.
“내 남자친구는 플레이보이야”라며 아무렇지도 않게 얘기하는 찬니에게서 뭔가 사연이 느껴졌다.

찬니는 20살에 혼자 태국에서 미국 아리조나로 와서 “천사같은” 남자와 결혼을 했지만 그 남자가 아이를 원하지 않아서 이혼했다고 했다. 하지만 정말 좋은 사람이었다고 강조를 했다. (내가 보기엔 아이 보다는 뭔가 더 깊은 사연이 있는 듯 했다) 그리고 덴버로 거처를 옮겼는데 길 가다 지금 남친에게 픽업 당한 거라고 했다. 처음엔 남친과 방 두개짜리 아파트에서 남친의 막내 아들과 같이 살았는데 남친이 하와이에 일자리를 얻어 4년 전에 왔다고 했다. 온 지 1년 후에 아이를 임신하고 출산했다고. 여기까지는 남친과의 엄청난 나이 차이에도 뭐 그런가 보다 했지만 의아해지는 부분이 있었다.

찬니: 지금 남자친구와 7년을 같이 살았지만 사랑한 적도 없고 사랑하지도 않아”
나: “그럼 왜 이제껏 같이 살고 있니?”
찬니: “아주 예전에 꿈을 꾸었는데 나한테 4살 정도의 여자아이가 생긴 꿈이었어. 그 애 얼굴이 지금 우리딸 얼굴이랑 똑같았어. 너도 봤듯이 우리애랑 내 남친이 얼굴부터 모든게 완전 똑같잖아. 그 남자를 처음 봤을 때 내 딸의 아버지란 걸 알 수 있었고 그래서 같이 한거야.
나는 내 운명이 보여.”

너무 황당해서 나는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확실히 찬니의 딸은 100퍼센트 백인이라 할 만큼 새하얀 피부와 반 곱슬의 갈색 머리결과 큰 녹색 눈을 하고 팔 다리가 길고 쭉 뻗은 서양인의 체구를 가지고 있다. 그에 반해 찬니는 전형적인 동남아 사람으로 구릿빛 피부에 곧고 새까만 머리칼, 그리고 눈매가 살짝 올라간 작은 눈을 하고 있다. 누가 봐도 모녀로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자신의 운명을 꿈으로 볼 수 있다는 말/잠에서 본 꿈을 운명처럼 믿는다는 그녀가 마치 광신교 신자 같았다. 덧붙여 자신은 싱글맘이라는 생각으로 살고 있으며 그 ‘시기’가 오면 지금 남친을 떠날 것이며 그 때 아이가 아빠랑 정이 들어 슬퍼하지 않도록 지금 남친과 아이가 같이 시간을 보내지 않도록 하고 있다고 했다. 어차피 남친은 아침 6시에 핏트니스 클럽으로 가서 바로 출근하고 저녁에 오니 아이랑 별로 놀 시간이 없으며 주말에도 남친도 혼자 해변에 나가거나 그다지 딸아이랑 시간을 보내는 것에 신경을 안 쓴다했다. 잠자리도 딸아이랑 찬니 둘이 자고 남친과는 따로라서 아이도 제 아빠를 별로 찾지 않는다고.
찬니는 남친 정신도 이상해서 약도 복용하고 있지만 나날이 더 심해질 뿐이며 최근에 더 센 약을 처방받아 먹고 있지만 소용없다고 했다. 혹시 폭력을 휘두르냐고 걱정스레 묻자 그건 아니지만 정신적으로 괴롭힌다고 했다. 그래서 아이가 없을 때 몇 번 남친 집을 나가 도망쳤지만 다시 돌아갔다고 한다. 왜냐고 묻자 “운명이니까, 아직 때가 안 돼서.”라고 대답했다.
찬니와 헤어지기 전 그녀가 한 마지막 말에 내 표정은 무표정이 돼버렸다.
“꿈에서 내 딸과 나는 아주 좋은 옷을 입고 있었어. 내 운명의 남자는 물질적으로도 우리를 편하게 해줄 사람이야.”

잠에서 본 꿈속의 남자를 기다리는 찬니와 언젠가 여친이 자신의 딸과 사라져버릴지도 모르고 동거하고 있는 그녀의 남친. 동상이몽이란 말이 딱 떠올랐다.
사람 각자마다 사연이 있고 가치관이 달라 다들 각양각색의 인생을 산다지만 찬니의 신념과 믿음은 나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찬니 이야기를 들으며 그녀 앞에서는 동의도 반론도 하지 않았다. 처음엔 그런 이야기 자체가 황당하기만 했다.
하지만 생각할수록 ‘잠속에서 꾼 꿈을 믿느니 지금 현실을 직시하고 남친이랑 헤어져 다른 남자를 만나든지, 막연하게 기다리지 말고 어떤 행동을 하는 게 낫다’라고 말해주고 싶은 욕망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결국 오지랖이라는 생각이 들어 아무말도 못했지만.

찬니는 아이들을 좋아하며 살갑고 좋은 사람이지만 나를 불편하게 하는 그녀의 꿈 얘기를 계속 들어야 한다면 어느날 그녀와의 연락을 끊어버릴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