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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은 개떡같이 말하면 개떡같이 알아먹는 우리 부부

혼자 아이를 키우는 대부분의 엄마가 그러하듯 나 역시 주말을 목 빼고 기다린다. 말 할 상대(남편)가 있는 것 만으로도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아이랑 단 둘이 보내는 것이 누런 현미밥을 꾸역꾸역 삼키는 것 같다면 남편이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시원한 숭늉을 마시는 느낌이다. 

그런데 이번 주말은 그 시원한 숭늉이 다 타버린 누룽지가 되어 텁텁하고 쓴 맛이 되어버렸다. 

발단은 내 영어 때문이었다. 점심 시간을 지나 좀 늦은 시간에 수족관으로 놀러 간 우리는 간단하게 핫도그와 감자 튀김을 먹기로 했다.  작은 애를 앞으로 업고 배낭까지 맨 남편이 사오기로 하고 나는 큰 아이랑 작은 놀이터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그 놀이터 바로 옆에는 해양 동물 보호을 위한 영상을 보여주는 소극장(작은 부스 같은)이 있었는데 큰 아이가 거기에 들어가고 싶어했다. 어떤 곳인가 잠깐 구경이나 해볼까 하고 들어가자 한 여자 아이가 우리 애를 보고 '하이!' 하고 부르며 반갑게 달려왔다. 그 여자 아이의 엄마 아빠도 곧 뒤따라 와서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알고보니 같은 반의 친구였다. 

그러는 동안 상영이 시작되어 스크린 맨 앞에 있던 우리는 그대로 앉아버렸다. 나는 남편한테 급하게 문자를 보냈다. (그리고 핸드폰을 꺼버렸다)

'We are at the theater, near by the slide'(우리 극장에 있어, 미끄럼틀 가까운 곳에)

소극장이라 하지만 작은 화장실 건물 같은 그 곳은 놀이터 미끄럼틀 바로 옆에 있었다.


20 분 후 상영이 끝나고 밖으로 나왔다.


햇볕에 눈을 적응시키자 눈에 들어오는 건 씩씩거리며 다가오는 남편이었다. 한 손엔 핸드폰, 다른 한 손엔 핫도그와 감자 튀김을 아슬아슬하게 들고 있었다. 

'뭐야? 어디 있었어? 극장에 있다며?'

땀에 젖은 얼굴이 햇빛에 번들번들거리고 울그락 불그락거렸다.(그나마 둘째가 목을 뒤로 빼고 꿀잠중이라 참으로 다행이었다)

'그래, 그렇게 말했잖아, 극장에 있다고. ('Yeh, that's what I said, we were at the theater.')

'극장 안에 있다고 했어야지, 영화 본다고 말했어야지!!!!!!!!' 놀이터 주위를 몇 번이나 뱅뱅 돌았는지 알아?!('You should've said you were IN the theater, not AT the theater!!! You should've said you were watching the movie!!!!!!!!!')

아기와 음식을 들고 약 20 분 동안 우리를 찾아 헤맨 남편은 뚜껑이 제대로 열렸는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인사를 하려던 큰 애 친구의 부모는 슬금 어디론가 가버렸다.

물론 영어를 잘못 쓴 내 탓이기에 곧 사과했지만 한숨이 나왔다. 아무리 우리가 같은 민족(?)이 아니라지만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먹는 사이는 아닌 것 같아 뭔가 씁쓸했다. 

잠시 후 화가 풀린 남편에게 극장에서 큰 애 친구를 우연히 만났다고 하니 그 아이 이름을 물어왔다.

'It's Madison.'(매디슨이야)

'뭐, 약(Medicine)이라고?!

짜증이 밀려왔다. (애 이름이니까 당연히 매디슨이지, 솔직히 메디슨이나 매디슨이나 그게 그거 아닌가?)

'당신, 염소가 어떻게 울지? 입을 크게 벌리고 ''매애애애애애애애''해봐'

남편의 영어 발음 교정이 시작됐다. 귀찮았고 존심이 살짝 상했다.

'그러는 당신 영어는 문법이 엉망진창이잖아'

남편이 조용해졌다.

(이곳은 하와이이다. 하와이는 미국 본토와 억양도 조금 다르고 무엇보다 '피진'이라는 영어를 쓴다. 단어도 완전히 다르고 틀린 문법도 자연스레 쓰인다. )

그 놈의 전치사 두 글자 때문에, 그 놈의 발음 애 때문에 꼬투리를 잡는 남편이 밉고 섭섭했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뚱해 있는 내 손을 슬그머니 잡으며 화내서 미안하다고 말하는 남편에게 한마디 했다.

'나도 영어 더 열심히 공부할테니 당신도 내 마음을 더 이해하고 뭘 말하려는지 헤아려줬으면 좋겠어.'

'오,,,마음을 읽어달라고?! 그게 제일 어려운 건데, 그래 나도 노력할게.'


정말이지 부부란 제일 친밀하면서도 제일 먼 관계같다.